국내

레전드 장윤창 오늘(30일) 별세

오늘도 한 2025. 5. 30. 16:45

 

한국 배구계의 거대한 별이 졌습니다.

 

오늘 오전, 1980~90년대 한국 남자배구의 전설 장윤창 교수가 향년 65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오랫동안 투병해온 위암과의 길고도 힘든 싸움이었습니다.

전설의 시작, 그 놀라운 데뷔

1978년 로마 세계선수권 - 한국 남자배구 역사상 최고의 순간! 바로 그 4강 신화의 주역이 장윤창이었습니다. 믿을 수 있나요? 인창고 2학년, 고작 17-18세의 어린 나이에 강만수, 김호철, 이인 등 쟁쟁한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주전 아포짓 공격수로 뛰었다는 것을!

'돌고래'의 폭발적인 점프력

그의 별명은 '돌고래'였습니다. 그 이유? 바로 물 위로 솟아오르는 돌고래처럼 폭발적인 점프력으로 펼쳐지는 후위공격 때문이었죠. 경기대 시절에는 한국 남자배구 최초로 스카이 서브(스파이크 서브)를 선보인 혁신적인 선수였습니다.

이후 김세진-박철우-임동혁으로 이어지는 한국 아포짓 거포 라인의 원조, 바로 그가 시작이었던 겁니다!

아시안게임 3연속 메달의 영광

  • 1978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 1982 뉴델리 아시안게임 금메달
  • 1986 서울 아시안게임 은메달

3개 대회 연속 메달! 이것이 바로 장윤창이 만들어낸 아시아 최강의 증거였습니다.

고려증권 왕조의 핵심

V리그 전신인 대통령배 시대,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했던 고려증권을 초대 챔피언으로 이끌며 총 6회 우승(2위 현대자동차서비스 5회)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절대적 에이스!

놀라운 것은 1995년 슈퍼리그 개칭 직전까지 현역으로 뛸 정도로 길고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는 점입니다. 그 비결? 철저한 자기관리였죠.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프로페셔널 정신이었습니다.

은퇴 후의 헌신

선수 은퇴 후에도 한국 배구를 위한 헌신은 계속됐습니다. 대한배구협회 경기감독관, 기술이사를 거쳐 경기대 스포츠과학부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썼습니다.

특별한 이야기 하나 - 아들 장민국은 아버지와 달리 농구 선수의 길을 택했는데, 최근 창원 LG 세이커스에서 챔피언결정전 우승의 감격을 누렸습니다. 부자가 각각 다른 종목에서 챔피언의 영광을 맛본 셈이죠!

배구계의 애도

김세진 KOVO 경기본부장: "한국 배구의 한 시대를 풍미하신 레전드고, 내 인생의 길잡이 같은 분... 가슴이 답답합니다."

신영철 OK저축은행 감독: "한국 배구의 큰 별이 졌습니다. 그 시대와 어울리지 않게 철저한 자기관리를 하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마지막 인사

고인의 빈소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마련됐습니다. 발인은 6월 1일 오전 5시 30분, 장지는 용인평온의숲 시안고묘입니다.

1980~90년대 한국 배구 황금기를 이끈 진정한 레전드, 장윤창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그가 남긴 배구 역사와 정신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